5월 4주차 주간보고 드립니다 (vol.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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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완두콩을 수확했습니다. 통통해진 꼬투리 안에 동글동글한 초록빛 완두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꼬투리마다 들어 있는 완두의 모양과 개수도 달라, 열어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이 귀여운 완두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죠. 시골살이 계정인 수풀사이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더니, 심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수확을 했냐는 이웃님의 안부 댓글이 달렸더라고요.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완두콩을 심은 뒤 바로 기다림이 시작되어버린 저에게는 벌써가 아니었지만 말이에요.
'이렇게 바짝 마른 완두에서 싹이 난다고?' 쪼글쪼글하게 마른 완두를 의심 어린 손길로 심은 게 3월 초입니다. 세어 보니 세 달 가까운 시간입니다.
저는 완두콩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넝쿨손을 뻗쳐 지지대를 감고 올라가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저 보란 듯이 싱그럽고 우아한 꽃을 피우고, 꽃이 진 자리에 납작한 꼬투리를 만드는 것도 지켜봤고요. 봄볕 아래 꼬투리를 통통하게 부풀리는 동안엔, 내내 비 소식이 없어 멀리 서울에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습니다.
참 기특합니다. 마른 봄바람이 이리저리 세차게 불어 대던 날들과 비 한 방울 없던 가뭄까지 지나고 열매를 맺은 완두가요. 지켜보는 이에게는 훌쩍 지나가버리는 시간이지만, 겪어내는 존재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완두가 자라는 세 달 동안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텃밭에 완두를 심은 직후, 저는 새 회사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만에 퇴사 결심을 하고 다시 퇴사원이 되었습니다. 수확한 완두로 달고 고소한 완두콩 밥을 지어먹는 지금은, 2개월 차 프리 에이전트로서 살고 있네요. 우당탕탕하면서요. 벌써, 같지만 사실 제게는 여러 의미로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올해, 2023년 봄. 완두와 함께 보낸 계절을 저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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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어르신인 앞집 할머니와 읍내에 다녀왔습니다. 할머니께서 맛있는 밥을 사 주신다고 하셔서요. 사실 저는 사 먹는 밥보다 할머니댁 집밥이 더 맛있지만, 또 할머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신 거겠죠.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가는 길엔 할머니와 근황을 나누었어요. 며칠 전, 서울에 다녀오시며 이야기보따리를 가득 채워 두셨더라고요.
이번 서울 방문은 얼마 전에 새 집으로 이사한 딸네 들르기 위함이었는데요. 딱 이틀 밤만 주무시고 내려오셨더라고요. 딸은 계속 더 있다 가시라고, 가실 거면 모셔다 드린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요즘 한창 돌보는 깻잎 밭이 마음 쓰여 더 있으실 수가 없으셨대요. 결국 따님이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을 틈타 도망치듯 나오셨다고 합니다.
"일찌감치 준비해 갖구, 자는 새 살곰살곰 나왔지. 문 소리 날깨비 살짝이 하면서이?" 혹시 문 소리에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딸이 깰까 봐 살금살금 하셨다는 부분에선, 기억 속 잠든 딸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시더라고요.
탈출(?)까지는 무사히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지하철역에서 발생했어요. 예전 딸네는 여러 번 방문해서 익숙한 데다, 지하철 호선이 하나만 지나는 곳이었는데요. 이번에는 이사 후 첫 방문이라 낯설기도 하고, 여러 호선이 지나는 환승역이었던 거예요. 거기에 지하상가와 연결된 복잡한 구간이요. 터미널에 가려면 환승이 필요한데, 출입구가 너무 많아 헤매시다 여기저기 물어보셨나 봐요. 어떤 이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거기선 또 왼쪽으로 가라고 하고, 왼쪽에선 다시 거기가 맞다고 하고. 그렇게 헤매시다 결국 차를 놓치셨대요. 어렵게 금산에 도착해서는 또 집으로 오는 버스를 놓쳐 다시 한참을 기다리셨고요. 그렇게 출발한 지 한 나절이 훨씬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신 거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힘들더라고요. 젊은 저도 그런 상황이면 힘들고 짜증스러웠을 텐데, 할머니는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우셨을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웃으시더라고요. "인쟈는 내가 확실하게 알았지. 어느 짝으로 가면 되는가. 담번에는 내가 잘 올 수 있지." 하시면서요.
그 사이 읍내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갈비탕을 사 주고 싶어 하셨지만,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 순두부찌개를 먹겠다고 했어요. 할머니는 갈비탕으로 저는 순두부찌개로 뜨끈하게 속을 채우고, 설빙에 가서 생딸기빙수도 먹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잔뜩인 곳에 늙은이가 와도 괜찮냐고 물으시며 웃으셨어요. 저는 속으로, 마음만은 할머니가 제일 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가 밝을 때 나섰는데 마을에 돌아오니 캄캄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대문 앞에 할머니를 내려드리며 밥도 맛있었고 오늘 재밌었다고 말씀드렸어요. 대문을 닫고 들어와 이 글을 씁니다. "나도 오늘 너무 재밌었어." 돌아온 할머니의 인사를 떠올리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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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고 요약
퇴사원이라 회장님도 못말리는, 진짜 tmi 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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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일]
완두콩밥을 지어먹고, 삶아 먹기도 했다. 완두콩이 이렇게 달고 꼬수운지 미처 몰랐다. 한 알 한 알 귀하게 여기며 먹는 농부의 마음. 앞으로 정말 음식 남기지 말아야지.
✔︎ 텃밭 지지대 세워주기
이제 지지대를 세워 줘야 할 때, 순 지르기를 해야 할 때가 보인다. 4년 차 농부의 짬바인가.
✔︎ 종합소득세 (다시) 신고
세금 신고를 하면서 보니, 작년 한 해 정말 촘촘히 일했구나 싶다. 회사를 다니며 번 돈(근로소득), 글 써서 번 돈(사업소득), 강연하고 컨설팅하고 광고하고 인터뷰해서 번 돈(기타소득)이 가감없이 반영된 세금. 스스로가 기특하기도 하지만, 적절한 쉼과 채움이 없는 노동은 결국 부작용이 생긴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에게 적절한 속도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번주 할 일]
✔︎ 새 책 계약
또 다른 도전이라 주저했던 책을 계약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작가님과 함께 하는 첫 작업이라 기대되기도! 도전해야, 나아진다고 믿으며.
✔︎ 클래스 제작 검토
MD 직무 클래스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현재 내가 가진 시간으로는 스스로 만족할 결과물을 만들기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은 고민해 볼 것.
✔︎ 5월 마감 및 회고
일 외에 몸과 마음 건강 측면에서도 회고하기.
✔︎ 집중시간 늘리기 테스트
책을 읽다가 갑자기 핸드폰을 본다던지, 일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메일을 쓴다던지 하는 일이 많다. 말하자면 멀티태스킹 중독. 문제는 어떤 것에도 집중을 못하고 있다는 것. 구글 타이머를 도입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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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간보고는 비 내리는 수풀집에서 썼습니다. 전국적인 비라고 하니, 구독자님이 계신 곳에도 비가 내렸을 것 같습니다. 초여름의 비가 그치면 텃밭의 작물들이 훌쩍 자라 있곤 합니다. 이 비가 제게도, 구독자님께도 그런 비였으면 좋겠습니다.
*제목으로 사용한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지 않고'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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