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주차 주간보고 드립니다 (vol.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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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갈아 이랑을 두두룩히 만들어두고 읍내에 다녀왔습니다. 농약사에 들러 배추 모종을 두 줄 사고 무씨도 새로 샀습니다. 쪽파 종구도 한 줌 사고요. 올해 김장을 책임질 작물들입니다.
배추 모종과 씨앗은 그대로 심으면 되지만, 쪽파의 종구는 다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바스러지는 겉껍질을 제거하고, 여러 개가 붙어 있는 종구를 적당한 크기로 쪼갭니다. 긴 수염뿌리는 잘라내고 윗부분을 가위로 살짝 잘라 마무리합니다.
매년 쪽파 종구를 다듬을 때마다 궁금했습니다. 왜 쪽파의 윗부분을 잘라내는지 말이에요. 이미 초록빛 싹이 나 있는 종구도 있는데, 굳이 그것을 잘라내고 생채기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여쭈어보니 순이 고르고 풍성하면서도 빠르게 자라게 하기 위함이래요. 싹을 이미 올린 경우도 있지만, 보관하며 그 싹이 대부분 마른 상태래요. 그대로 심어도 자라긴 하겠지만, 성장이 더딘 것이지요. 그러니 쪽파에 부러 작은 생채기를 내고, 그것을 회복하는 힘을 내게 함으로써 성장을 가속화시키는 거죠.
제 삶에도 이런 생채기들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부디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라지만- 지나고 보면 저를 훌쩍 성장하게 했던 아픔들이요. 손 끝에서 쪼개지고 잘리는 쪽파 종구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일이 찾아오면 문득 이 순간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고요. 푸르고 풍성한 줄기를 올리기 위해 작은 생채기를 감당하는 쪽파를 바라보던 순간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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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물러가니 달리는 일이 더 좋아집니다. 아침저녁으론 특히 더 달리기 좋은, 선선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덕분에 비가 오는 날도 달리러 나갑니다. '오히려 좋아'의 마음으로요. 여름과 가을 사이, 적당한 비, 달릴 수 있는 시간. 이 세 가지가 겹치는 행운은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부슬부슬 비가 오는 어린이대공원을 달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록빛이던 메타세콰이아 나무는 어느새 붉어졌고, 커다란 플라타너스의 이파리는 이미 낙엽이 되어 흠뻑 젖었더라고요. 길을 따라 조로록 심긴 가을 풀꽃도 빗방울을 머금어 아름다웠어요. 평소 같았으면 사진을 찍었을 텐데 달리는 중이라 그럴 수가 없었어요.
몇 분 달리고 몇 분을 걷는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데다, 달릴 때는 허리에 차는 러닝벨트에 핸드폰을 넣어두는데요. 꺼내려면 굉장히 번거롭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거든요. (사실 두번째 이유가 큽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풍경을 달리면서 바라봤습니다. 같은 나무인데도 어떤 이파리는 부지런히 노랗고 빨간 빛깔로 물들었고, 어떤 이파리는 여전히 초록빛으로 반짝이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더라고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드는 순간, 빗방울 섞인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뭇잎 냄새, 풀 냄새, 흙 냄새가 가득한 바람이었어요. 사진을 잊은 채 벌게진 얼굴로 킁킁거리며 신나게 달렸습니다. 가을이 제게로 마구 쏟아져 오는 것 같았어요.
오늘 달린 것은 공원이 아니라 가을이었던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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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고 피드백
저는 큰 쉼표를 찍고 돌아왔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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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현주님께서 아름다운 답장을 보내주셨어요. 8월의 주간보고 '작은 쉼표를 찍으며'를 받으신 뒤 보내주신 답장입니다.
현주님은 직장인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직장인들에게 휴가란 언제나 큰 의미이지만, 여러 정체성으로 일상을 꾸리느라 바쁜 현주님께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이번 휴가에 가족이 아닌 동행과 몽골 홉스골이라는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오셨대요. 답장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 모두 크고 작은 쉼표를 찍으며 일상을 여행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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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초원과 큰 호수가 있는 홉스골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어요.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긴 시간 오프로드를 달려 도착한 그곳에서의 제 느낌은 이상했습니다. 행복함만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치고 약간은 우울하기까지 했어요. 자유시간에는 일행들과 잠시 떨어져 큰 숲으로 들어가서 30분 동안 엉엉 울었습니다. 슬픔을 다 꺼내놓고 나니 제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38년을 살면서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꼭 멀리 떠나와야만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곳에서 스스로를 토닥여주고 잘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격려했습니다.
드넓은 초원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낯선 문화를 경험하며 저는 큰 쉼표를 찍고 왔습니다. 이제는 일상에서 자주자주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사거나 오늘 하루 수고한 제 발을 정성스럽게 마사지해주면서요. 틈나는대로 제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요. 오늘은 미리님께 이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일상의 작은 여행을 대신해봅니다.
_위 사진과 글의 저작권은 모두 김현주님께 있으며, 동의를 구하고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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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부터 퇴사원 주간보고는 월간 2회 월요일, 비정기로 발행됩니다. 주간보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매주 월요일 발송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내년에 출간될 책, 계절편지, 청탁 원고, 외주 업무와 병행하다보니 매주 정기발행이 쉽지 않네요. 너른 이해를 부탁드려요.
또 퇴사원 주간보고는 비정형으로 발행됩니다. 기존에도 뚜렷한 형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자유로운 형태를 시도해보려고요. 짧은 산문이나 편지글을 보내거나 사진으로만 된 주간보고를 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실 이야기가 있다면 편히 답장을 보내주세요. 다음 주 주간보고는 쉬어갑니다.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갑니닷.) 9월의 어느 월요일에 다시 주간보고를 보내겠습니다. 그럼 평안한 한 주 보내세요.
2023년 9월, 퇴사원 김미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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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은 김미리에게 있으며, 출처 표기 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merrymiry)
- 매주 월요일 발행되며, 매주 화요일 브런치에도 게시됩니다.
- 읽으신 후 답장을 보내주신다면, 기쁘게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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