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소식을 인스타그램에 쩌렁쩌렁 전한 뒤로, 근황을 묻는 연락을 받곤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뭘 하며 지내느냐고요. 답을 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더라고요.
“삶을 단출하게 정리하는 것”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보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지내는 것”
소박하지만 큰 결심이 필요했던 이것들을, 단순히 '○○○을 하며 지내고 있다'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어요. 퇴사원 주간보고가 그 물음들에 대한 답이 될지도요. 동시에 스스로를 위해 비워 둔, 가장 긴 시간에 대한 기록이 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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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일자를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항공권 검색입니다. 가 봤던 도시, 한 번쯤 가보고 싶었지만 내내 인연이 닿지 않았던 도시들을 순서대로 검색했어요.
퇴사 후 여행은 특별하잖아요. 다음 주의 내가 해야 할 일을, 이번 주의 내가 당겨서 하고 가는 여행이 아니니 컨디션이 좋을테죠(야근행진하고 떠난 여행에서 꼭 병이 났던 사람). 꼭 돌아와야 하는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일정도 여유롭겠죠. 돌아오자마자 해결해야 할 업무도 없으니- 얼마나 산뜻해요.
그런데 제 마음은 이상하게 피로하기만 하더라고요.
항공권 검색결과를 가격과 소요시간 순으로 정렬해 보고, 경유 여부나 항공사별로 필터도 걸어보는 그 짜릿한 순간. 그 도시에 가면 들를 곳, 먹을 것, 할 것을 검색하며 메모하는 순간. 준비물을 체크리스트로 만들다가 '에라이, 없으면 가서 사지 뭐. 카드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대충 마무리하는 순간. 그 좋았던 순간들이 설레기는커녕 마냥 귀찮더라고요.
이 피로함과 귀차니즘을 타파하고 떠난다면, 분명 좋을 거란 건 알아요. 여행은 늘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 다시 이 복잡하고 발 디딜 틈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여행은 돌아온 후에야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여백이 생긴, 지금 여기의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여행지에서 맞는 하루하루처럼 소중히요. 그 매일동안 삶을 단정히 하는 일들을 해나갈 거예요.
이 여행지는 아주 익숙한 곳입니다. 저는 친절한 바리스타가 있는 아늑한 까페를 알고, 멋진 공원을 알아요. 구글맵을 켜지 않고도 갈 수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숙소도 있어요. 거기에는 '소망이'라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도 있답니다.
대신 이런 것도 있어요. 오래된 음식이 잔뜩 들어서 열기도 싫은 냉장고, 계절 지난 옷이 잔뜩 쌓인 옷장이요. 한두 번 쓴 핸드크림이 널려 있고, 먼지가 슬며시 쌓인 화장대도요.
편안한 것들은 찬찬히 누리고, 보내주어야 할 습관과 물건들은 차분히 보내주려 해요. 여분을 많이 소유하지 않는, 여행자의 마음으로요. 일상을 여행하기로 결정한 것은 삶을 가볍고 단출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향해 꿋꿋이 달릴 수도, 넘어지면 재빨리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벌써 여행지에서 맞는 두 번째 주간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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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관한 제 마음은 언제나 극과 극입니다. 요리욕이 마구 차 올라서 제철채소를 탐구하고, 매 끼니를 직접 해 먹으려 애쓰는 시즌이 있고요. 요리가 권태로워져 배달 앱만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시즌이 있어요. 일명 요태기인데요. 이게 벌써 몇 달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시즌의 냉장고는 좀 무섭죠.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블랙홀 같은 거예요. 수풀집에서 키워서 수확해 온 작물들, 온라인 장보기로 배달된 식재료, 배달해 먹고 남은 음식을 모두 품고 있거든요. 냉장고를 여닫을 때마다 죄책감이 흘러나와요. 그래서 아예 냉장고를 열지 않고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일의 반복이죠.
이런 블랙홀 같은 냉장고를 드.디.어. 정리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참나물, 브로콜리, 감자, 쌈다시마 같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를 지웠어요.
배달앱을 다시 설치하고 있을 제 모습이 벌써 보이는 것 같지만, 적어도 냉장고를 열기 싫어서 배달음식을 찾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참나물에 시판 참소스 두 바퀴 두르고 고춧가루만 뿌려도 너무 맛있습니다. tmi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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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부딪히고, 물건을 떨어뜨리는 일이 잦습니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저는 원래 조심성이 많고, 여러 번 확인하는 성격이라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쪽이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제가 그래요. 계속 넘어지고, 다치고, 물건을 놓치거나 망가뜨려요.
얼마 전에 물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는 단순한 작업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제가 오른쪽 물건을 집을 때는 왼쪽을 보고, 왼쪽 물건을 집을 때는 오른쪽을 바라보더라고요. 계속 행동하는 쪽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니 물건을 제대로 집지도 못하고, 계속 놓치고 떨어뜨리죠. 의식적으로 작업하는 방향을 계속 바라보려고 애써 봤어요. 그랬는데도 몸보다 시선이 빨리 다음 방향을 보더라고요.
순간, 알았습니다. 아, 이거 습관이구나. 항상 지금에 집중하지 않고 훌쩍 다음으로 가버리는 습관. 급한 마음이 이렇게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요즘 저는 혼자서 소소한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캠페인의 이름은, "끝까지 바라보기"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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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고 요약
퇴사원이라 회장님도 못말리는, 진짜 tmi 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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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일]
✔︎ 퇴사원 주간보고 구독자 모집
예상보다 구독신청자가 많아서 긴장과 당황 중. 진짜 별 거 없는 편지인데 큰일이구나.
✔︎ 냉장고 정리 + 일 1회 집밥 해 먹기
더 이상 반찬통으로 테트리스 안 해도 된다니...!
✔︎ 도서관 회원가입 + 책 대여
광진구 1n년차 거주자지만 광진구립도서관은 처음.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니 학창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 독립서점 투어
수풀집편지 독립출판을 위한 시장조사. 독립서점 자체보다 힙한 망원동의 분위기에 놀람. 까페에 갔는데 커피에도 코스가 있다고 해서 1차 놀람. 신청곡 고르라고 해서 2차 놀람.
✔︎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북토크
좋아하는 김신지 작가님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생애 첫 북토크. (물론 내 책 북토크 빼고)
✔︎ 발목 치료 시작
성인이 되면 스스로의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자식이 다친 지 몇 달 만에 병원에 데려가는 엄마라니... 너무하네. |
[이번주 계획]
☐ 수풀집편지 독립출판용 원고 모으기
☐ 옷장 + 화장대 정리
☐ 개인 메일함 / 핸드폰 연락처 정리
☐ 자작나무숲 or 수목원 다녀오기
☐ 에세이 원고 마감
☐ 전통시장 가서 현금으로 장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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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영 작가의 웹툰 중에 <좋아하면 울리는>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반경 몇 미터 안으로 들어오면 알람으로 알려주는 어플이 생긴다는 설정이죠. 요즘 제 세상에는 이 어플이 생긴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들 가까이 가면 제 마음이 지잉지잉 울리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사람이었구나.' 놀라고 있어요.
퇴사원 주간보고도 그렇습니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글로 떠벌거리는 일을 좋아하네요, 제가. 저는 다음 주 월요일의 주간보고로 다시 찾아올게요.
2023년 2월, 퇴사원 김미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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