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같은 햇빛을 바라보며 주간보고를 씁니다. 오늘은 2월 19일, 일요일이고요. 24절기 중 2번째 절기 우수입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눈이 녹아 비가 되는 절기라지요.
"우수 뒤에 얼음같이" 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겨우내 아무리 꽁꽁 얼었던 얼음이라도 우수가 지나면, 누그러지고 곧 사라진다는 말이래요.
봄이라는 자연의 계절과 퇴사원이라는 삶의 계절을 맞아, 제 속에 묵은 감정들도 찬찬히 녹아 흐른다면 좋겠습니다. 우수 뒤에 얼음같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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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간단히 소망이 소개를 하자면요. 몇 달 뒤면 만 4살이 되는 엉아 고양이이고요. 그루밍을 즐기는 편이지만, 사실 딱히 깔끔하지는 않은 털털한 고양이입니다. 참고로 MBTI는 ESFJ, 사교적인 외교관이예요(가끔 소망이 MBTI 어떻게 했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던데, 제가 소망이로 빙의해서 검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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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는 아침 7시가 되면, 침대에 누워있는 제 가슴팍에 뛰어 올라와요. 그러고는 '그릉그릉' 소릴 내며 골골송을 부릅니다. 최근 6kg를 돌파한 덕분에 등장하는 순간, 깰 수 밖에 없어요. 아주 묵직하거든요.
하지만 게으른 인간은 어찌저찌 잠을 이어보려 애쓰죠. 그러면 소망이는 기지개를 펴는 척 하며, 솜방망이 같은 손을 벌어진 제 입에 쏙 넣습니다. 아니, 이 발은... 똥 싼 모래도 덮고, 오줌 싼 모래도 덮는 그 발 아니야? 저는 정색하며 눈을 뜹니다. 그러면 소망이는 마주친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 골골송을 불러요. '앗, 실수!' 하는 (얄미운) 느낌이랄까요.
결국 잠에서 완전히 깨버린 제가,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오늘 아침도 다르지 않았어요. 소망이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주고 돌아서서, 저도 따순 물을 한 잔 마셨습니다. 소망이가 토록토록 사료를 골라 먹는 소리를 들으면서요. 잠시 후 소망이는 자기 화장실로 가더니 볼일을 보고, 모래로 '스륵 챡, 스륵 챡' 소릴 내며 덮더라고요. 저도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변기에 앉아 가만 생각하니 좀 웃기더라고요. 함께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각자의 화장실에 앉아 일을 보며 동시간대를 보내는게요. 우리는 너무나 귀여운 생명체들이구나. 따로 또 같이, 성실히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지친 날에는 먹고 마시는 일, 자는 일, 싸는 일. 삶을 위해 필요한 이런 기본적인 일들조차 너무나 번잡스럽고 벅차더라고요. 제게 그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으니 분명 그런 순간을 또 맞닥뜨리게 되겠죠?
그런 순간이 다시 오면, 저는 이 순간을 떠올릴 것 같아요. 소망이와 제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고, 성실했던- 이 순간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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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숨이 찹니다. 어떤 비유가 아니라요, 말 그대로 숨이 가빠요. 요즘 전혀 바쁘지도 않은데 제가 자주 헥헥 거리고 있더라고요. 이상하다 싶었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관찰해봤어요. 가만 보니 저는 가슴이나 배를 쓰지 않고, 코와 입으로만 숨을 쉬는데, 그것도 아주 얉고 짧게 쉬더라고요. 그러니 늘 숨이 모자라고 숨이 차는 느낌이 드는 거죠.
유튜브에 '심호흡하는 법', '호흡법' 같은 단어들을 검색해봤어요. 영상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가장 조회 수가 많은 영상을 따라해보았습니다. 2, 3분만 호흡에 집중해도 땀이 나서 이마가 촉촉해지더라고요.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새로 배운 호흡과 원래의 호흡이 엉켜서- 들이쉬어야 할 타이밍에 내쉬고, 내쉬어야 할 타이밍에 또 내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의도와 달리 무호흡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숨을 딱 1분만 참아도 힘들잖아요. 조금 더 참으면 아득해지고요. 사람이라면 매 순간 숨쉬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사소하면서 중요한 숨에도 제 조급함이 들어있다니 놀랍더라고요. 그리고 미안해졌어요. 제 폐와 십이지장, 손과 발이 이 조급한 숨들로 얼마나 피로했을까 싶어서요.
지난 주 "끝까지 바라보기"에 이어 새로운 캠페인을 추가해야 할까 봐요.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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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고 요약
퇴사원이라 회장님도 못말리는, 진짜 tmi 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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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일]
✔︎ 수풀집편지 원고 모으기, 출간기획서 작성
조직에 속한 사람으로 일을 할 때 기획서란 대체로 다른 이를 위한 것이었다. 남에게 보여주고 설득하기 위한 것. 이 기획서는 나만을 위한 것이었고, 스스로 일의 방향을 잡기 위한 기획서였다.
✔︎ 하루 한 번 집밥
된장과 청국장에 미친 자가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네...?
✔︎ 에세이 원고 마감
에세이는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을 담는 글이다. 허구를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솔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쓸 때마다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가, 늘 고민한다. 브런치 글 보러가기
✔︎ 화장대 정리
많은 화장품을 줄 세워 놓고 골라 쓰는 나보다, 꼭 필요한 화장품 몇 개만 단출하게 두고서 끝까지 쓰는 내가 더 멋지다. 쓰다가 함부로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덜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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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계획]
☐ 커머스 컨설팅 (프리랜서 MD로 일하기)
☐ 수풀집편지 가목차 작성 for 독립출판
☐ 가족 모임
☐ 출판사 미팅 (feat. 다음 책 쓸 수 있을까요?)
☐ 지난 주에 못한 옷장 정리
☐ 지난 주에 못한 개인 메일함 / 핸드폰 연락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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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퇴사원/전 퇴사원/언젠가의 퇴사원님들로부터 온
주간보고 피드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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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님 '여기를 내 여행지라고 생각하자.' (...) 그렇게 살아보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냥 지나다니던 길목도 해가 질 땐 꽤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놀며 내는 웃음 소리가 괜히 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일상을 새롭게 살아가면서 주변의 것들에 감사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Y님 여행처럼 산다는게 어려운 일이지만, 저도 나만을 위한 휴식시간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쇼파에 앉아 시원한 보리차를 마시며 퇴사원 보고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활기찬 내일을 위해 저는 이제 뜨끈한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갈거에요.
N님 저도 어느 순간부터 다리엔 항상 멍이 들어있고 핸드폰 액정 필름은 새것이 일주일도 못가는 편인데 이번 글을 읽고 저도 제 급한 성격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B님 저도 옷장과 화장대 메일함을 조금씩 정리하는것을 목표로 삼고 이번주를 보내보겠습니다. (...) 아, 발목 빨리 치료하셔야해요. 전 30대의 염증이 40대 들어서니 눈덩이가 되어 저를 덮쳤어요!
L님 저는 요리에 취미가 없어서 독립후에는 나를 먹이는 의무감으로 그렇게 요리를 간신히 해 왔는데, 요샌 그 시간도 너무 아깝게 느껴져 일단 단촐한 섭식생활을 해보려고 노력중이에요.
E님 부지런히 적으셨을 이번 주 계획을 이루셨을 다음 주 주간보고가 기다려져요! 이번 주도 전통시장에서, 수목원에서, 끝까지 바라보는 혼자만의 시간들 속에서 미리님의 좋아하는 마음이 띠링띠링 자주 울리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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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집에서 살며 계절을 살피고 소중히 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계절이 그냥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더라고요. 계절이 지나간다는 것은, 괴로운 현재가 과거가 되었다는 뜻일테니까요.
자기가 쓴 책에는 현재 통과하는 계절을 사랑하고 충분히 누리라고 해 놓고, 속으로 계절이 지나기만을 빈다니.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즈음에 퇴사하기로 마음 먹었고요.
퇴사 후 2주가 지났고, 저는 2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은 회사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이라는 것이요. 그리고 책 쓴 사람도 늘 자기가 쓴 책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도요. 저는 '회사 다니는 사람'일 뿐 아니라 '회사 다니는 사람'이고, '책 쓴 사람'이자 '책 쓴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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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무척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꽃샘추위 소식이 있기는 하지만, 제 마음에 온 봄을 무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오늘도 쓰다 보니 무척 길어졌습니다. 저는 다음 주 월요일의 주간보고로 다시 찾아올게요.
2023년 2월, 퇴사원 김미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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