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의 무더위와 함께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여전히 한낮의 기온은 30도 안팎으로 무덥지만,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요. 에어컨이나 선풍기 없이,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지해 보내는 밤들이 생겨납니다. 이제 여름보다 가을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지만, 늦은 여름휴가를 보내려 합니다. 말하고 보니 가을(준비)휴가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회사를 벗어나 프리 에이전트로 일하고 난 뒤 처음 보내는 휴가입니다. 클라이언트들에게 휴가로 인한 부재를 알리고, 협업하는 회사와는 대체 근무일정을 조율했습니다. 쓰고 있는 책의 원고 마감일도 조정했고요. 부재 시 업무를 대신해 줄 대체업무자가 없으니 인수인계가 없고, 협업자들과의 복잡한 스케줄 조정과정도 없습니다. 대신 휴가를 다녀와 늘어진 일정을 어찌 따라잡을지만 차분히 그려 놓았어요.
회사원이던 시절, 제 여름휴가는 보통 6월 초였습니다. 오랫동안 패션 MD로 일했기 때문에, 보통 상품주기에 맞추어 휴가를 가곤 했는데요. 봄 상품 프로모션이 마무리되고, 여름 신상품 프로모션이 시작되기 전이 그나마 여유 있었어요. 그래서 매년 6월 6일, 현충일이 끼어있는 그 주간이 제 여름휴가가 되었습니다.
덜 바쁜 때지 바쁘지 않은 때는 아니기 때문에, 휴가지에서도 항상 노트북을 펼치게 되더군요. 한국과 시차가 있는 곳에서 머물고 있을 땐- 밤새 울리는 업무 메신저에 괴로워하기도, 협력사의 전화를 모닝콜 삼아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동 중엔 한국 시간을 곁눈질하며, 특정 시각에 열려야 하는 기획전이나 특가 딜 같은 행사를 매섭게 모니터링하기도 했고요.
그럴 때면 생각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휴가를 와야 할까. 휴가 중 생기는 막막한 일을 멀리에서 감당하는 것도, 회사에 있는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함께 휴가를 보내는 동행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힘들었거든요. 게다가 휴가 전후도 고통스러웠고요. 다들 휴가를 떠나기 전엔 미래의 업무를 당겨하느라, 복귀한 후에는 과거의 부재를 메우느라 몸과 마음이 바쁘잖아요.
휴가를 보내며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익숙한 곳을 벗어나 쌓는 경험. 좋아하는 이들과 보내는 시간. 이 모든 것이 소중했지만, 일련의 과정은 그와는 별개로 버거웠던 것 같아요. 올해 퇴사원이 되고 달리 퇴사여행이나 휴가를 떠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프리 에이전트로 일하고부터는 일의 속도와 강도를 스스로에게 맞춰 최적화했기 때문에, 따로 휴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스스로를 쉬게 해 주었어요. 저는 스스로를 고용한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요,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기더군요.
꼭 지쳐야만 휴가를 떠날 수 있나?
저는 일과 삶을 명확히 구분하기보다, 그 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삶(워라블, Work-Life Blending)을 지향합니다. 언제든 쉴 수 있지만 언제든 일할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지칠 정도로는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지친 상태의 저는 생각보다 더 흉악(?)하다는 걸 잘 알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가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다며 휴가를, 휴식을 유예하고 있네요.
아마 제 마음속에 휴가는, 전력질주 혹은 마라톤 같은 일을 마치고 나서 '내가 죽어도 더는 못 뛰겠다' 싶을 때에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분류되어 있었나 봅니다. 지쳐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기 위해 떠나는 게 휴가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그리하여 저는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5일 간을 휴가로 정했습니다.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이라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요. 지금 막 떠오른 일은, 서울집과 수풀집의 살림살이를 단출하게 정리하고, 집 안팎을 정돈하는 일이에요. 양 쪽 집을 오가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 쓰일 일이 많은데요(폭우와 폭염, 태풍이 순서대로 지나가기도 했고요). 단출하고 단정한 집과 함께 할수록, 삶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도 적어지더라고요. 여름을 보내주는 물놀이도 한 번 하고 싶네요. 멀리 떠나도 좋지만, 수풀집 앞 개울에서도 충분할 것 같아요. 아, 오랫동안 고민하던 소설 쓰기 온라인 수업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가을 텃밭 계획도 미리 해 놓고요.
벌써 닷새의 휴가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채워진 기분입니다. 일주일 뒤, 비워진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그득 채워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