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제주로 떠납니다. 월요일까지 엿새 동안 제주에서 머무는 일정입니다. 하루는 한라산을 등반하고, 다음 날부터 올레길을 걸어보려고요.
휴대폰의 사진첩을 뒤적여보니, 마지막 제주가 2018년 가을이더라고요. 그때도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맑을 거라는 예보가 있었고, 고도가 낮은 곳은 예상대로 화창했습니다. 그런데 산을 조금 더 오르자 비바람이 몰아치고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정상에는 온통 뿌연 안개와 여기 백록담이 있다는 표지석만 보였어요. 고대했던 백록담은 형체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맑은 날 백록담을 바라보는 행운은 3대 이상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속설이 왜 나왔는지 알겠더라고요.
이번 일정에도 날씨예보는 맑다고 하는데, 모를 일입니다. 화창한 날씨 속에서 백록담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다가도, 그냥 무사히 잘 다녀오면 그것으로 족하다며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5년 전의 저는 지금의 저보다 다섯 살이 어렸잖아요. 등산스틱은커녕 레깅스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은 채 별생각 없이 한라산으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그랬다간 큰일 날 것 같아요. 게다가 그때는 한라산이 일정의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은 일정의 첫날이기도 하고요.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는 올레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새해 소망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를 적었었어요. 봄에 퇴사를 하고는 '정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요. 새로이 시작한 여러 일들로 오히려 바빠져서, 올해에는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멀리의 순례길이 힘들다면, 비교적 가까운 국내의 여러 길들은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걷는 것이 목적이지, 산티아고가 목적은 아니니까요. 아름답다고 소문난 올레길부터 걸어보자 결심하고 떠납니다. 일정이 짧으니 완주는 할 수 없겠지만, 다음엔 이번 여정을 마친 곳에서부터 이어서 걸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요.
짧다면 짧은 엿새간의 걷기 일정을 준비하며 세 가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첫째. 걸었던 길을 인위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둘째. 필요한 물건은 모두 배낭에 메고 걷는다.
셋째. 지금의 마음에 집중한다.
차량 렌트를 하지 않았습니다. 렌터카를 이용하면 걷고 난 뒤 차를 픽업하기 위해 다시 택시나 버스를 이용해 그날 걸은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데요. 하루종일 걸은 길을, 고작 십여 분 만에 차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걸으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제 마음을 방해할 것 같거든요. 배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정을 위해 필요한 제 물건은 제가 메고 걷고 싶어요. 한라산에 오를 땐, 노트북처럼 파손의 위험이 있는 짐만 등산로 입구 물품보관함에 맡기고 다녀오려고요. 미련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제가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배낭을 메고 앞으로 나아가며- 내딛는 걸음에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18일 수요일부터 23일 월요일까지, 길 위에서 짧은 글과 사진을 보내겠습니다. 퇴사원의 출장보고라고 이름 붙였지만, 제주에서 부치는 엽서처럼 생각해 주세요. 여정을 위해 준비한 체력이 미비하여, 아주 짧은 분량이 될 것 같습니다. 여정이 너무 피곤한 날은 쉬겠습니다. 여행을 떠난 친구가 좋은 풍경을 만났다며 갑자기 보내온 카톡처럼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