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극을 좋아합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살았던 사람, 있었던 사건, 존재했던 것들의 모양새를 흥미롭게 가공하고 압축하고 또 꾸며내어 만드는 이야기들을요. 동서양의 시대극,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해요.
아, 좋아하는 것에 비해 관련 지식은 별로 없는 편입니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좋아하는데 잘 모른다는 건 이제부터 알아갈 게 많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행지에 오면 역사적 명소에 꼭 들르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반복해서 여러 번 들르는 편입니다.
프라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라하의 역사를 간직한 ‘프라하 성’과 보헤미아부터 프라하로 이어지는 시간을 간직한 요새 ‘비셰흐라드’에 여러 번 들렀고 체코의 여러 사건들이 벌어졌던 장소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대극을 즐겨본 덕분인지 여러 명소에서 국가, 도시, 가문을 대표하는 문장(紋章)들을 쉽게 발견하고 있어요. 또 명소의 안내판에서 (실제 역사는 아니지만) 당대 사람들이 믿었다는 전설이나 야사들을 발견하고 상상을 덧대는 일을 신나게 즐기고 있죠. 머릿속으로 벌써 시대극 수십 편 상영했고요... (막장 + 개연성 없음 주의)
프라하 성에는 성 비투스 성당을 포함해 여러 개의 성당과 건축물이 있어서 전체를 둘러보는 데 하루는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벽면에 걸린 목재 부조 하나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관련된 이야기를 보고 듣는 데에 20여 분은 족히 걸리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시대극들이 왜들 그렇게 길고 시즌을 거듭하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시대극은 장르 특성상 에피소드 수가 많거나 시즌제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과거 한국의 사극도 마찬가지였죠. 드라마 ‘태조 왕건’은 제가 중학생 때(2000년) 방영을 시작했는데요. 무려 200회를 방영하고 제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2002년)에 종영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긴 대하드라마도 시간이 흘러 역사가 되는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속도와 비교하면 무척 짧고 빠릅니다. 한 화 안에서 선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등장하며, 전쟁을 시작하고 함정에 빠지고, 패전하기도 하잖아요. 이제 보니 그래서 시대극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시간을 빠르게 감으며 지금 제 삶을 잘 풀어갈 힌트를 얻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직접 살며 배우려면 그건 너무 시간이 걸리고 뒤늦기도 할 테니까요.
게다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시대극 속에는 수많은 암투와 사그라들지 않는 욕망들이 가득 차 있죠. 사실을 기반으로 허구를 더할 수 있으니 너무나 그럴싸한 이야기가 완성되고요. 덕분에 저는 복잡한 삶의 관계와 끝없는 욕망을 잘 다루었던, 혹은 그렇지 못해 파멸한 이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내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후자에게 더 마음을 쓰는 편입니다. 욕망에 충실한 등장인물이요. 사랑 때문에, 돈 때문에, 술 때문에, (명예라고 이름 붙인)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고군분투하다 처절한 끝을 맞이하는 인물들이죠. 저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악함에 성내고 분노하면서도 가끔씩 응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제 안에도 선명하게 존재해서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