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에 올랐어. 산에는 벌써 단풍이 한창이더라. 산행 초반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담아야지. 그래서 네게도 보내줘야지' 생각했는데, 산을 오르다 보니 핸드폰을 꺼낼 여력이 없었어. 오로지 다음 발을 어디에 디뎌야 괜찮을까만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바람이 휘잉 불어오고, 나무 위에서 새가 지저귀고, 풀숲에서 노루가 나타날 때- 그럴 때나 한 번씩 멀리, 바라봤어.
한라산에서는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만났어. 산처럼 너그러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거의 다 왔어요', '힘내세요', '이거 하나 드세요', '신발 끈 풀리셨어요', '먼저 가세요', '즐거운 산행되세요'. 산이 험했지만 그런 다정들 덕분에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어. 나도 그 양보와 친절을 배워 내려오는 길에 써 먹었지.
물론 그런 사람들만 만난 건 아니야. 음주 금지인 곳인데도 버젓이 술판을 벌인 사람, 아무 데나 가래침을 탁탁 뱉는 사람도 있었어. 그 중 나를 내내 괴롭게 했던 이들은, 음악을 스피커로 크게 듣는 사람들이었어. 짜증이 나더라고. 산의 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은데, 시끄러운 노래 소리 때문에 아무 것도 들리지가 않으니까. 속도 내거나 늦춰서 그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때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하산 중인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은 웃으면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랠 따라부르고 있더라?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했어. 그 노랜 이미 그 사람의 것이었어...!
그걸 보니까 내 마음도 달라졌어. 음악소리가 더 이상 짜증나지 않더라고. 언젠가 이 노래를 들으면 오늘의 산행이 생각나겠구나, 싶고. 우연히 받은 다정들이 그랬듯, 유쾌하지 않은 이 상황도- 내가 정한 게 아니니까. 지금 여기서 내가 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마음 뿐이니까. 좋은 마음을 선택하자 싶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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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다보면 진짜 더 이상은 못 가겠다, 싶은 구간이 나오잖아. 깔딱고개라고 부르는 구간 말이야. 이번에도 있었어. 산행을 시작한지 네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나. 이제 거의 다 왔다는 표지판이 있길래, 앞을 올려다 봤는데... 엄두가 안 나는 풍경이 보이는 거야. 위에 사진에 하얀 울타리 보여? 사진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길 말이야. 그 끝이 목표지점, 정상이었어. 저 위까지만 가면 되는데,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지더라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잠시 쉬기로 했어. 배낭을 내려놓고, 올라온 방향을 돌아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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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이런 게 보이더라. 구름이 발 아래 있고, 내가 걸어온 길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어. 그제야 다시 산을 오를 힘이 났어. 산을 오르면서, 그리고 또 살면서- '얼마나 남았나' '뭘 더 해내야 하나' 가늠하다 지칠 땐, 이렇게 한 번씩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더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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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엔 해발 1950m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 올랐어. 5년 전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백록담이 저기 있겠거니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렸는데, 이번에는 선명히 바라볼 수 있었어. 날이 가물어 백록담에 물이 없었지만, 그건 5년 뒤에 다시 오라는 한라산의 초대가 아닐까.
그때도 네게 편지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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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원 출장보고 제주편은 평어로 보냅니다. 평안한 밤 보내시길, 제주에서 빕니다.
2023년 10월, 제주에서,
퇴사원 김미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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