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첫날을 제외하곤 내내 날씨가 좋아. 화창하고 하늘이 맑아서, 한낮에는 여름처럼 무더워. 그늘이 없는 해안길을 걷다 보면 몸을 타고 흐르는 땀이 느껴져. 아까는 감귤주스나 한라봉 주스 같이 시원한 걸 하나 사서 마시면서 걸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마침 눈앞에 감귤주스를 파는 가게가 있더라고. 여기서 사면 되겠다 싶었지.
그런데 가게가 좀 허름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선뜻 들어설 마음이 들지 않는 거야. 한라봉주스도 없고 말이야. 속으로 생각했어. 더 걷다 보면 여기보다 괜찮은 가게가 있겠지. 거긴 한라봉 주스도 팔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무심결에 그 가게를 지나쳤어. 그 뒤론 인적 드문 해안도로가 한참 이어졌어. 사람도, 가게도, 주스도 없는.
"와, 좋다! 이 길을 시원한 감귤 주스 마시면서 걸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아쉬웠어. 멋진 풍경과 함께 즐기는 음식은 어떤 추억이 되잖아. 괜히 고민하다 맛있는 추억을 놓쳐버린 것 같았어. 그냥 감귤주스 한 잔인데, 더 좋아봤자 얼마나 좋을 거라고 망설였을까.
감귤주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바닷가에 앉아 김밥을 먹고 싶었거든? 왜 하필 김밥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러고 싶더라고. 두리번거리며 김밥집을 찾았지. 앗, 저기 김밥가게 있다! → 이런 날씨에 김밥은 금방 쉬어 버리니까 조금 있다가 사자 → 김밥집이 없네... (점심때가 한참 지나 식당에서 밥 먹음) → (김밥집 발견) 지금은 너무 배부르니 내일 먹자.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몰라. 결국 나는 바닷가에서 김밥을 먹지 못했지. 바닷가/김밥 가게/식욕의 존재가 겹쳐진 순간이 없었거든. 편지를 쓰면서 생각하니 허탈하고 웃기네.
스스로에게 늘 물어. '지금 이 선택이 베스트야? 더 나은 건 없어? 너 확실해?' 하고 말야. S, 너는 여행지에서 먹는 주스와 김밥에도 그런단 말이야? 하고 웃을지도 몰라.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며 웃고 있거든. 생각해 보니 그냥 습관인 것 같아. 아무리 사소한 선택도 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을 선택을 하겠다는 생각의 무한 반복 말이야.
감귤주스도 못 마시고 김밥도 못 먹은 여행자는(...) 지금 길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베스트란 '제일 좋은'이라는 의미니까 꽤 많은 별로를 경험해봐야 고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저 그런 것을 수없이 경험하고, 가끔은 워스트를 만나고 나서 말이야. 사실 베스트는 뒤를 돌아보며 고르는 것이지 앞을 내다보며 예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특히 이런 여행지에서는 말이야.
이제 나는 올레길 걷기를 멈추고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려 해. 지난 편지에 그랬잖아. 대체 뭘 위해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걷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고. 여행의 끄트머리인 지금은 답할 수 있어.
사실 나는 내 속의 한 부분을 늘 대충 짐작하고만 있었거든. 그곳을 한 번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어.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분(밥벌이, 인간관계)은 아니라서 늘 미뤄두고 있었던 어떤 부분을 말이야. 해야 할 일이 걷기밖에 없는 요 며칠 동안 그 사소하고 어렴풋한 부분을 열심히 들여다봤지. 그리고 알게 됐어. 전에는 요원했던 내 일부, 이 부분이 앞으로 내 일상을 열심히 꾸려줄 거라는 걸.
산으로 오르고, 길을 걸으며 편지를 부칠 네가 있어서 참 좋았어. 이번 여행은 퇴사원 출장보고의 수신자가 되어 준 너로 완성된 것 같아. 고마워.
퇴사원 출장보고 제주편을 오늘로 마무리합니다. 보내주신 답장들은 소중히, 여러 번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 퇴사원 주간보고 발송일은 11월 12일입니다. 지난 번 봤던 자격증(식물보호산업기사)시험의 실기 준비로 약간의 텀이 생기게 되었어요. 다음 편지를 부칠 땐 계절이 바뀌어 있을 것 같습니다. 평안한 가을날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