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그랬다. 층고가 높아 난방효율이 떨어진다는 점, 북향집이라 집 안 깊숙이 햇빛이 들지 않는다는 점, 먹자골목이 가까워 창문을 열어두면 소음이 심하다는 점… 살면서 몇몇 단점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테라스가 주는 기쁨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상추와 부추, 허브를 심고 끼니마다 수확해 먹는 기쁨, 실내에서 키우기 어려워 망설였던 꽃나무를 들이는 기쁨, 집 안에서도 라일락 향기를 맡는 기쁨, 야외용 테이블에 앉아 모닝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쓰는 기쁨, 독립된 공간에서 일광욕을 맘껏 즐기는 기쁨, 햇볕 아래서 빳빳하게 말린 빨래를 사그락사그락 개는 기쁨,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소망이와 내 발자국을 남기는 기쁨…… 몇 개의 단점들을 대적할 기쁨들이 지나치게 많았으니까.
그러나 계절이 몇 번 지나고 나자 테라스가 주는 기쁨도 금세 익숙해졌다. 열성적인 마음이 자주 그러하듯이. 가끔은 집에 테라스가 있다는 것을 잊을 때도 있다. 물론 거기엔 익숙함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어느 날 길 건너에 큰 건물을 철거하더니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호텔과 대형 상가시설을 짓는다고 했고 벌써 일 년 넘게 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라도 마실라치면 “두루룩퍽퍽(중장비 소리)! 콰앙카강카강(쇠 부딪히는 소리)! 삐이잉삐이잉(덤프트럭 경보음)!” 소리가 동시에 테라스를 울린다. 햇빛 아래 주욱 몸을 펼치고 있던 소망이가 놀라 도망치듯 먼저 거실로 떠나면 나도 커피잔을 들고 따라 들어온다.
공사 소음 없이 테라스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이른 새벽이나 늦은 저녁, 공사를 쉬는 휴일뿐이다. 그나마도 어느 날은 너무 덥고, 어느 날은 너무 춥고, 어느 날은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 날을 맞추기 어렵다. 사이사이 테라스에 앉기 좋은 날엔 비가 쏟아졌다. 그러다 어렵게 타이밍을 잡고 앉은 날이었다. 벽 너머에서 소곤거리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웃집 사람들 역시 테라스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 오늘, 바로 지금, 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 집 테라스는 단독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테라스를 가벽으로 이분할한 구조다. 테라스의 왼쪽은 앞집, 오른쪽은 우리 집과 연결되어 있다. 중간에 사람 키를 한참 넘는 나무벽이 설치되어 있어 서로가 보이지는 않지만, 단출한 방부목 벽을 넘어 인기척과 목소리가 쉽게 전해진다. 벽 너머의 이웃들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단숨에 조용해졌고,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가 테라스에 흘렀다. 이웃과 테라스를 사용하는 시간이 겹칠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온다. 테라스 문을 닫고 들어와 다시 중문을 닫고. 조용한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남은 커피를 마셨다. 말 없는 식물들, 나른한 소망이, 그리고 나뿐인 집에서.
반면 주말의 수풀집은 늘 북적인다. 아침마다 울음소리가 다른 새들이 찾아오고, 처마 밑에 집을 짓기도 한다. 동네고양이들이 시시때때로 찾아와 밥을 먹고, 목을 축이고, 담장 그늘 아래서 쉬어 간다. 나는 아침이 밝으면 새들이 대청마루 위에 잔뜩 싸 놓은 똥을 치우고, 고양이들이 곳곳에 파묻어둔 똥을 찾느라 바쁘다. 과거엔 모종삽이었으나 현재는 똥삽이 되어버린 삽을 들고 마당을 빙빙 돌며 똥을 수집한다. 주말 아침마다 똥 콜렉터가 되어야 하는 현실이 유감스러운 날도 있지만.
한 바퀴 똥 투어를 마치고 나면 본격적으로 텃밭 일을 시작한다. 이웃집과 우리 집의 경계를 만드는 야트막한 돌담 너머에서 일정한 소리가 반복된다. 이웃집 어르신이 호미질 소리다.
“어르신, 오늘은 지각이시네요?”
“어이구우. 오랜만이네. 이 짝에다 아주까리를 심을 땅 좀 미리 맨들어 놓을라고.”
“아주까리요? 그게 뭐예요. 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무슨 노래도 있지 않아요?”
“글치! 맞어. 아주까리 동백~ 거 나오는 거여. 이 짝으로 건너와 봐. 건너와서 봐봐.”
돌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작물과 꽃을 자랑하다 결국 대문을 넘는다. 활짝 열려있는 낡은 대문을.
이웃집에 아주까리 씨앗 구경을 다녀와서 대청마루에 앉았다. 마당 한 편에는 올해도 금낭화 싹이 돋아났다. 심지 않았는데 마당에 절로 피어난 야생화. 5월이 되면 낚싯대 같은 꽃대에 분홍색 꽃송이가 조롱조롱 맺힐 것이다. 참, 금낭화도 노지 월동이 가능한 꽃 아닌가? 왜 여태 금낭화를 꼭대기집 테라스에 심을 생각을 못 했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금낭화를 두어 개 캤다.
그날 밤, 다시 꼭대기집으로 돌아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맥주를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 그러나 테라스 문을 열자마자 다시 거실로 들어갈까 생각했다. 이웃집 테라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몇 초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순간, 주고받던 대화소리가 조용해지고 잔잔한 음악이 켜졌다. 나는 테이블에 맥주를 놓고 앉았다. 이웃의 음악을 한 곡만 빌려 듣기로 했다. 제목도 가사도 모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끝나고 이웃집 사람과 (손님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노래가 또다른 아주까리 씨앗이었다는 것을.
바깥공기를 묻히고 거실로 들어서자 소망이가 맞아준다. 부스스한 얼굴로 혼자 테라스에서 뭐 했어, 하는 눈빛을 보낸다. 나는 소망이를 쓰다듬어 주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냈다. 내일 아침엔 금낭화를 테라스 화단에 옮겨 심을 것이다. 화원에서 온 식물들, 졸린 소망이, 또 다른 이웃들이 함께 사는 우리 집 테라스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