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일주일 넘게 고민하다가 겨우 예약을 하고 구글 캘린더에 추가해 놓은 뒤 며칠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해요. '사흘 뒤에 가는 날이다', '이틀 뒤에 가는 날이다', '내일 가는 날이다' 하면서요. 대체로 의사 선생님을 만난 후 약을 받아서 오는 평범한 진료인데, 고통스러운 처치를 받는 것도 아닌데... 저는 왜 이렇게 병원 가는 것을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십대 시절을 기초생활수급자로 보냈어요. 생계가 곤란한 이들에게 국가가 (최소 생활을 위한) 교육/주거/의료/생계급여 분야의 지원을 하는 제도죠. 그때 제게는 의료보험증이 아니라 의료보호증이 있었습니다. 의료보호증이 있으면 본인부담금을 제외한 의료비를 국가에서 지원합니다. 의료 혜택에 사각지대에 놓이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거죠.
덕분에 돈 때문에 병원을 가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병원 문턱은 늘 이상하게 높았습니다. 모든 병원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티 나게 차별적 진료를 하거나 얼굴을 붉히게 하는 병원들이 더러 있었거든요.
충치가 생겨 치과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보통 충치치료를 하게 되면 보철물 종류를 설명하고 선택하게 하잖아요. 보험이 적용되고 가격이 저렴한 아말감으로 할지, 본인부담금이 높아 비용은 비싸지만 치아색이 나는 레진이나 지아이 같은 소재로 할지, 내구성이 뛰어난 금으로 할지요. 간호사 선생님이 제게 치료한 부분을 때울 보철물 설명을 시작하자, 멀리서 치과 원장 선생님이 외쳤습니다.
"의료보호 1종이야, 뭘 설명하고 있어. 그냥 아말감으로 때워주고 보내!"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병원에 쩌렁쩌렁 울렸지만 저는 태연한 척 접수처에 앉아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가 있진 않나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죠.
음식을 먹고 단체로 탈이 나서 반 친구들과 함께 병원에 간 적도 있었는데요. 분명 제가 제일 먼저 접수했는데 제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고요. 제 뒤로 접수한 친구들은 진료가 끝났는데 저는 계속 기다리는 상황이 펼쳐졌어요. 친구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어요. 왜 네 이름은 안 부르냐고요. 친구들은 몰랐을 테지만 저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은 일이었으니까요. 친구들은 대체 너는 언제 부르냐고 몇 번이나 물으면서도 진료가 끝날 때까지 함께 기다려줬습니다.
"오늘 수납할 비용은... 천 원이네요."
간호사 선생님의 말에 친구들은 한번 더 의아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같은 진료인데 저만 병원비가 쌌으니까요. 병원을 나서며 친구들에게 기초생활수급과 의료보호에 대해 설명했어요. 친구들은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하다고, 그런 걸로 차별하는 병원이라니 절대 다신 가지 말자고 외쳤어요. 친구들 덕에 다시 마음이 환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의 저는 그 시절보다 몇 곱절 나이를 먹었습니다. 차별을 경험하거나 누군가를 향한 차별을 목격하면 꼭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죠. 친절하고 책임감 있게 진료하는 병원들을 훨씬 더 많이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병원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곳이에요. 과거의 경험이 현재까지 범람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 같아요. 과거는 현재와 이어져 있으니까요.
이 글이 꽉 닫힌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면 좋겠지요? 왜 병원 가기가 그토록 싫었는지 알아냈고, 마침내 상처받았던 마음도 극복해 냈다고요.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과거를 많이 돌아보며 사는 사람이고, 경험한 것들에 비추어 삶을 해석하고 앞으로를 상상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다고 이 경험들을 싹 지워버리거나 모른 척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귀하게 여기며 살고 싶어요. 굳이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기억하고 싶어서요. 병원 대기실에서 눈치 보고 있던 열다섯의 제가 있었기에 세상을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제가 알지 못하는 삶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병원 가기를 남들보다는 주저하며 살아갈 것 같아요. 그때마다 고개를 돌려 이제껏 보지 못한 시선의 가장자리를 열심히 살펴보며 넓어지려 합니다.
근데 일단... 다음 주에 갈 병원부터 예약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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