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주차 주간보고 드립니다 (vol.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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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입니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벌레들, 삼라만상이 잠에서 깨고 새싹이 움트는 때라지요.
꽁꽁 얼었다가 슬쩍 녹기를 반복했던 수풀집 앞 개천도 마침내 모두 녹았습니다. 나무의 잎눈과 꽃눈도 통통해졌고요. 물이 오른 망울을 터트리고 각자의 빛깔을 뽐낼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아침 산책 중에 보니, 물가에 갯버들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더라고요. 이른 봄에 겨울눈을 벗고 은색 털을 자랑하기 시작해서, 봄의 전령사로 불립니다. 어째서 '버들강아지'로 더 많이 불리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는, 보송보송한 비주얼입니다. 꽃샘추위가 지나고 3월이 깊어지면, 은빛 솜털을 벗어내고 빨갛고 노란 꽃을 피울 테지요.
갯버들의 꽃말은 포근한 사랑 그리고 자유입니다. 갯버들 사진에 꽃말을 더해 주간보고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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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서 일까요. 오늘은 퇴사원 주간보고가 아니라, 전에 발행하던 (시골살이 뉴스레터) 수풀집편지를 쓰는 기분입니다. 이야길 꺼낸 김에 시골살이 이야기를 더 해볼까 봐요.
지난주부터 온 마을이 고향의 냄새로 가득합니다. 고향의 냄새가 뭔 줄 아시죠? 시골 마을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입니다. 본격적인 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퇴비를 주는 시즌이 있는데요, 요즘이 딱 그 시기입니다. 이 즈음 수풀집에 놀러 왔던 친구는, 혹시 주변에 축사나 푸세식 화장실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그만큼 강력한 냄새긴 해요.
저 역시 처음에는 코를 틀어막고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하며 가자미눈을 했는데요. 이제는 "드디어 봄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신호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수풀집 텃밭도 봄맞이를 했습니다. 깊이갈이를 하고 퇴비를 뿌린 후, 이랑고랑을 두두룩이 만들어 두었어요. 다음 주에 씨감자를 심으며 봄 농사를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 소란한 저희 집 마당을 건너다보시던 이웃 어르신이 완두콩을 한 주먹 쥐어주고 가시기 전까지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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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도 없던 완두콩이 올해 수풀집 텃밭의 첫 작물이 되었습니다. 농사가 늘 이런 식으로 계획을 벗어나기 때문에, (MBTI 마지막 선호지표가 파워 J임에도) 농사계획이 매우 듬성듬성한 편입니다.
다음 주 수풀집에 도착했을 때, 완두콩의 싹이 나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아직은 저어기 멀리에 있을 푸르고 동그란 잎, 무엇이든 감고 올라가는 덩굴손, 뽀얗고 소박한 꽃, 통통한 꼬투리, 동글동글한 열매까지도요.
어르신이 일러 주신 대로 이랑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홈을 내어 쪼글쪼글한 완두콩을 두어 개 넣고, 포슬포슬 흙을 덮었습니다. 이 작고 쪼글쪼글한 동그라미가 수십 수백 개의 완두콩이 되어 맺힐 수 있을까요? 기다려보려고요. 농사는 기다림이 전부인 일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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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끼 이상의 집밥을 해 먹고, 동네 공원과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늦도록 읽고, 쓰고 싶은 글이 있으면 새벽까지 쓰고, 출근 걱정 없이 잠자리에 듭니다.
그중 가장 좋은 건, 알람 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투두리스트를 잊은 채 하루를 마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퇴사원으로 지낸 한 달. 모든 게 좋았습니다. 충만했어요. 이런 결정을 한 과거의 저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냅니다.
이제는 꺼두었던 알람을 다시 켜고, 투두리스트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일의 세계로 돌아가려 합니다. 저는 구)퇴사원이자 현)회사원이 되기로 결정했답니다. 퇴사 소식을 쩌렁쩌렁 전했으니, 복귀 소식도 성실히 전해봅니다.
세상에는 멋진 프리워커들이 너무나 많고, 또 이런 일의 방식이 주목받는 시대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언젠가는 조직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일하고자 하고요. 그렇지만 아직 직장인으로서 해 보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조직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단정한 일상을 꾸리는 직장인들을 존경하기도 하고요.
이커머스MD로 열심히 일하는 동시에, 꾸준히 글 쓰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회사원이지만 꼭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쓰는 일은 늘 고통스럽지만 재밌고,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니까요.
자신 있는 체 소식을 전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번 만의 일은 아니예요. 지난 13년 간 일곱 번 입사하고 일곱 번 퇴사했지만, 제 결정에 확신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미 한 선택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게 애쓰며 지내온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입니다. 퇴사원이었던 날들이 있었고, 언젠가 다시 퇴사원이 될 거라는 것. 다시 퇴사원이 되고 싶을 때, 제 몸과 마음이 그러라고 할 때- 자유로운 마음으로 퇴사원을 선택할 수 있으리란 것.
구독자님들께 퇴사 후 일상을 퇴사한다는 보고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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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보고 요약
퇴사원이라 회장님도 못말리는, 진짜 tmi 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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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 일]
✔︎ 2월 회고
좋았던 부분이 개선할 부분보다 더 많은 흔치 않은 레어달. 역시 퇴사원 효과인가! 그러나 건강관리만은 성실하게도 개선할 부분에 머물러 있다. (매달 개선할 부분 출석율 100%) 좋았던 부분으로 한 번쯤 가줄 만도 한데...
✔︎ 3월 계획
(건강관리 빼고) 뭘 더 하려기 보다는 2월에 좋았던 부분들을 잃지 않고 잘 보듬어 잘 데려가기. 회사원의 삶도 단정히 지내기. 퇴맥 멀리 하기.
✔︎ 수풀집 텃밭 퇴비 작업
내내 퇴비 없이 깊이갈이를 하다 올해 처음으로 퇴비를 줬다. 퇴비 버프로 너무 농사가 잘 되는 상황 상상중.
✔︎ 정리 : 메일함 O / 연락처 O / 옷장 X
옷장 정리를 3주 동안 미뤘더니, 구독자님들이 답장을 보내셨다. 대체 옷장은 언제 정리할거냐고... 이번 주도 못했지만, 여러분은 모르시겠죠. 퇴사원 주간보고는 이번주가 끝이니깐. 푸히히.
하지만 마지막으로 믿어 보세요. 3월 6일 월요일. 오늘 주간보고를 보낸 후, 꼭 할 겁니다! 개구리도 겨울잠을 깨는 절기라는데 제가 옷장 정리를 안해서 되겠습니까? (구독자 답장 금지어 : 옷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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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퇴사원/전 퇴사원/언젠가의 퇴사원님들로부터 온
주간보고 피드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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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님 퇴사라는 게 저에겐 너무 큰 일이라 망설이고 있었어요. 물론 미리님도 이면의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시겠지만 퇴사원 주간보고를 읽으며 큰 위로를 받았어요. '쉬어가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잠시 쉬고 다시 달릴 힘이 있을 때. 그때 일을 시작하려고요. 용기 주셔서 감사해요.
L님 삶을 구석구석 산다는 말 참 좋네요. 저도 그렇게 한땀한땀 꿰듯이 삶을 살고 싶은데, 늘 현실은 우당탕퉁탕 둥둥 떠있듯이 어느 순간 흘러가며 살아버리게 되네요.
J님 퇴사원 주간보고를 읽는 순간은 오롯이 행복해집니다. 비록 남자 아이들의 다투는 소리, 저녁 준비부터 해야할 일이 쌓여있지만 이 순간은 참 몽글몽글해집니다.
M님 영감의 씨앗이 될 수 있으면 기쁘겠다 하셨는데 저에게는 이미 많은 영감을 주고 있어요.
S님 제가 지금 마주한 이 진흙구덩이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지만, 그 끝에는 수풀집처럼 아름답고 편안한 그런 휴식처가 있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H님 퇴사원 주간보고 계속계속 쭈욱~ 읽고 싶어요. 특별한 주제도 없는데 (좋은 의미) 왜 이렇게 재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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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선물 받은 퇴사 케이크에 'Suful is free' 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어요. 퇴사원으로 지내는 지난 한 달간 그 문장처럼 지냈습니다. 앞으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나날에도 잊거나 잃지 않으려 합니다.
공식적인 퇴사원 주간보고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언젠가 제가 퇴사하는 날 (혹은 퇴사 위기가 닥쳐오는 날) 불시에 주간보고를 보낼지도 모르겠어요. 게릴라성 메일이 부담스러우시다면, 메일 최하단 수신거부를 클릭해주세요. 구독이 해지됩니다.
오늘 주간보고는 제가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로 마치려 합니다. 그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 우리가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희망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바삐 살다가 나를 놓쳐버린 기분이 드는, 내 삶인데 어째서 나 하나를 행복하게 해주기가 이리도 힘든가 상심하는 누군가 있다면 여러 번 접은 쪽지처럼 이 말을 건네고 싶다.
우리에겐 아직 쓰지 않은 용기가 있다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있다고.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도, 언제든 내가 나에게 더 나은 시간을 줄 수 있다고. „
- 김신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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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아직은) 퇴사원 김미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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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은 김미리에게 있으며, 출처 표기 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merrym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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