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회사 다녀요' 혹은 '이커머스 업계에서 일합니다'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십여 년 간 쭈욱 그랬죠. 요즘은 좀 다릅니다.
어느 날은 프리랜서MD로, 어느 날은 콘텐츠 기획자로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때로는 작가, 강연자로 소개하기도 하고요. 제 이름만 새겨진 개인 명함을 내밀기도, 협업하는 브랜드의 이름과 제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명함을 건네기도 합니다. 역할과 책임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요. 업무에 필요한 스킬 또한 매번 달라집니다.
새삼 놀라운 것은 퇴사원으로 일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스킬들은 회사원 시절 너무 하기 싫었던 일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회사원으로 12년 간 일하며 여러 회사를 거쳤는데요. (오늘의집과 휠라코리아를 제외하면) 커리어의 대부분을 초기 스타트업에서 보냈습니다. 제 포지션은 어디서나 온라인MD였지만, 업무 중 '상품기획'이나 '온라인 판매'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굉장히 적었어요. 지금이야 그러한 일들도 상품 사이클 중 꼭 필요한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어요.
인쇄 디자인/감리, 웹개발 기획, 정산 기획, 세금계산서 발행, ERP 구축, 물류 출납, 계약서 법리 검토, CS, VMD, 상세페이지 디자인, 소재개발, 디자인권 출원, 해외제휴⋯⋯ 해보기는커녕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일들이 제 책상을 습격하곤 했습니다. 이 일을 왜 지금, 왜 하필 내가 해야 하는가 생각하곤 했습니다. 생각의 끝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였죠.
더 큰 문제는 '스타트업’이라 불리는 회사에는 매뉴얼이나 선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 선배는 보통 검색, 일단 해보고 망하기, 죄책감, 밤샘수습 같은 것이었어요. 이 선배님들은 급작스럽고 유난스러워서 저를 무척 지치게 했죠.
"이런 일 말고 상품기획, 기획이 하고 싶다고!!!"
눈앞에 떨어진 일들을 억지로 하면서 속으로는 하기 싫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퇴사 생각을 수없이 했어요. 그런데 너무 바빠서 그만둔다는 말을 할 틈이 없더라고요... '내일은 꼭 퇴사한다고 말할 거야. 상품기획 중심으로 일할 수 있는 데 찾아서 갈 거야.' 잠들기 전에는 늘 그렇게 다짐했는데 출근하고 나면 바빠서 깡그리 잊었어요... 웃픈 일이죠. 안 그만둔 게 아니라 못 그만둔 셈입니다. 결국 퇴사한 시점은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회사 안에 더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때였으니- 그 또한 신기합니다.
몇 년이 지나 시니어가 되자 그 싫었던 일들 덕분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니, 그 일들을 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싶은 일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담당하는 상품들의 시작과 끝은 물론 그와 연결되는 다른 분야의 일들을 알고 있었고, 맡고 있는 카테고리와 서비스 너머의 일들을 애쓰지 않아도 그릴 수 있었어요.
회사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 경험치에 기대어 일했지만, 퇴사원이 되어 조직 밖으로 나오니 그로 인해 배운 것들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전혀 모르는 일의 구조를 그리는 법, 외부 관계자와 빠르게 협업관계를 구축하는 법, 혼자서 가볍게 시작하고 무겁게 맺는 법. 모두 하기 싫은 일들로부터 배운 것들입니다. 글을 쓰고 보니 스티브 잡스의 (너무도 유명한) 스탠퍼드 졸업축사가 떠오르네요.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미래를 내다보며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과거를 돌이켜보며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의 점들이 미래에 언젠가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제 저는 회사의 안과 밖 사이, 조직의 경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프리랜서MD, 콘텐츠 기획자, 작가, 강연자로 다양한 일과 사람을 만납니다. 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들과도 여전히 대면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일들이 저를 어떻게 키워낼지 모르므로 일단 스스로를 던져보고자 합니다. 언젠가 이 점들이 이어질 거라 믿으며 아주 힘껏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