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해야지, 미리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니까. 어린이였다가 청소년이 되는 동안 줄곧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새 이름으론 뭐가 좋을지 구체적으로 고민도 했다. 나름 기준이 있었다. 세련될 것. 단번에 기억에 남을 것. 기준은 계속해서 바뀌고 더해졌다. 성별을 특정할 수 없는 이름일 것. 가까운 친구나 지인과 겹치지 않을 것. 그랬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개명을 심각하게 고민해 왔다. 그런데 막상 글로 쓰려니 그 수많았던 후보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저런 키워드로 기억 속을 검색해서 연두, 해수, 래인, 모아, 온유처럼 마음이 동했던 이름들을 몇 개 찾아냈다. 사실 그 외에도 몇 개의 이름이 더 떠오르긴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다소 수치스러우므로 자체 필터링을 하겠다.
미리라는 이름은 흔했다. 같은 반에 동명의 친구가 꼭 한 명은 있었다. 그럴 때는 큰 미리, 작은 미리로 구분했고 언제나 체구가 조그만 내가 작은 미리가 되었다. 학급에 미리가 둘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이름 뒤에 알파벳이 붙었다. 미리 A, 미리 B, 미리 C 같은 식으로. 우리는 누군가 서로를 호명할 때 함께 돌아보았고 가끔 노트가 바뀌었다.
한자 시간엔 달랐다. 우리는 노트 겉면에, 시험지 위에, 숙제 위에 자신의 한자 이름을 적어 넣었다. ‘미리들’은 열이면 열 모두가 아름다울 미(美) 자를 썼다. 아름다울 미자를 쓸 때 먼저 와이 자를 닮은 길쭉한 획을 그려 놓고서 그를 가로지르는 획이 둘인지 셋인지 넷인지를 헷갈려하는 모습도 비슷했고. 아름다울 미 다음에 쓰는 이름 자는 달랐다. 친구들은 보통 이로울 리(利), 다스릴 리(理), 영리할 리(悧)를 썼다. 나는 배나무 리(梨) 자를 그리듯이 썼다.
'배나무 리'는 나무 목(木)과 이로울 리(利)가 합쳐진 모양이다. 한자사전에는 별로 쓰이지 않는 글자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명이나 상호, 배의 종류를 구분할 때만 가끔 쓰인다고. 한자 이름을 쓸 때마다, 볼 때마다 생각했다.
- 별로 쓰지도 않는 글자를 왜 이름 자로 넣었대?
아름다운 배나무. 내 이름은 아빠가 지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나. 궁금해도 물을 수 없다. 그가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부터 쭉,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덟 살의 나는 아빠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질문불가의 상황이 슬프지 않았다. 서른여덟의 나는 내 삶에서 그의 죽음을 뺴 버리고 싶지 않으므로 이 사실이 애틋하지 않다. 그래서 한자 그대로의 뜻 말고 별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산다.
대신 다른 질문이 생겨났다. 아름다운 배나무라고 이름 지을 때, 그 순간엔 나의 탄생을 기뻐했을까. 어린이였다가 청소년이었다가 성인이 된 나는 계속해서 물을 수 있었지만, 나보다 젊은 나이에 그저 죽기를 택한 그는 결코 답할 수 없다. 때문에 그 질문은 수신인을 잃은 채 오랫동안 내 안을 휘젓고 다녔다. 괜찮은 날도 있었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날도 있었고,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엉망이라고 생각되는 날도 있었다. 물음표는 내 안에 쌓이고 또 쌓였다.
그러다가 문득 알았다. 알아졌다. 모든 면에서 아빠보다 한참 어른이 된 나는, 이제 그를 대신하여 답할 수 있다. 네가 태어나서 더없이 기뻤고 또 기쁘다고. 이로움이나 영리함, 다스림 같은 것 말고 그냥 배나무를 품고 사는 너를, 내가 아주 오래 지켜봤는데 볼수록 더 마음에 든다고.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다고. 그러니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잎눈을 틔우고, 꽃망울을 맺고, 꽃을 피우고,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고, 세월을 거듭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배나무가 되라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