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가족 송년회를 하자고 했다. 나는 ‘도통 시간이 나질 않으니 봐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답했다. 다시금 전화를 걸어와 내친김에 날짜를 잡자고 했을 때에도 다시 미뤘다. 그렇게 12월의 3분의 2가 지나가버린 새벽녘,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전화를 받고 알았다고, 지금 가겠다고 답했다. 5분도 되지 않아 핸드폰이 다시 떨기 시작했다. 너머에서 ‘아버지가 죽었어’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죽었다.
‘돌아가셨다’고 적지 않는 건 그가 어디로 돌아갔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게 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디에 닿았든 아버지의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곳이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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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가족들이 슬퍼만 할 수 있는 예식이 아니다. 슬픔은 살아있는 이들의 몸 안에 있지만, 죽은 이의 몸은 마음도 없이 세상에 덩그러니 있어서다. 그것이 장례식이라는 절차를 매우 현실적이고 무척이나 촉박하게 만든다. 특실인지 일반실인지, 어떤 소재로 만든 관과 수의를 선택할지, 손님들에게 낼 음식은 어떤 것으로 할지부터.
우리 가족에게는 그 외에 결정도 있었다. 아버지의 의붓자녀이며 법적 가족관계가 아닌 나와 오빠를 상주에 포함하여 부고를 낼 것인지, 그렇다면 아버지와 다른 성을 표기할 것인지 성은 빼고 이름만 적는 방식을 채택할 것인지 같은 결정들.
아버지와 나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무렵에 처음 만났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족이 되었다. 그로부터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오해와 이해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이해보다 오해가 쉬운 탓에 대부분은 오해에 가까운 곳에 머물렀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나라서, 내게서 멀어졌다가도 다시 또 나라서, 늘 내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또 생각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날에 이르러서야 아버지가 되어볼 마음을 먹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를 셈해본 것도 처음이다. 그 시절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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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날 새벽은 몹시 추웠다. 한파가 예보된 탓에 장지로 향하는 길엔 상복 위에 패딩을 껴입었다. 입으며 나는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라 ‘내 자리’로 다시 왔다. 친구들이 모두 유명 브랜드의 패딩을 입고 다니던 시절의 나,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나로.
나는 아버지 가게 밖에서 할 말을 몇 번이나 연습한 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리저리로 말을 빙빙 돌리다 용기 내어 말했다. “두꺼운 패딩을 사야 될 것 같아요.” 아버지는 가게 돈통에서 얼마를 꺼내어 쥐어주며 말했다. “이거면 충분하지?”
가게를 나와 돌아오는 길에 그 돈을 내려다보며 엉엉 울었다. 사고픈 패딩 반의 반쪽도 살 수 없는 돈이었다. 돈통 안에는 지폐가 꽤나 많았는데도. 그런 종류의 일들이 내 마음을 꽁꽁 얼게 했었더랬다. 내 마음은 언제나 거기, 상처 입은 아이의 마음에 멈춰 있었다.
그때 영정사진 속 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더 달라고 말을 하지… 이거면 택도 없다고….” 나는 아버지가 땅에 묻히는 순간에도 오해와 이해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제 몸도 마음도 없이 작은 함에 들어있는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아버지는 애들 입는 패딩이 얼마인 줄 모르잖아. 아버지도 아버지는 처음이니까…”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젊은 남자가 어느 날 십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면서 얼마나 힘들고 상처받았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서투름이 곧장 원망이나 서운함으로 연결되는 것에 얼마나 지쳤을지 헤아린 적도. 삶이 너무 무겁지 않느냐고 다정히 물어준 적도 없다. 내 마음을 춥게 했던 패딩 사건 같은 일이, 아버지라고 왜 없을까. 더 많겠지. 이제는 꺼내 놓을 수 없는 그 마음 안에 고단함이 얼마나 많을지. 그의 자리가 무척이나 고된 자리였음을 너무 늦게 알아간다.
“얼마나 힘들었어. 미안하고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을 전할 수 없는 이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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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엄마, 오빠 그리고 동생들이 수풀집에 모였다. 아버지가 추진했던 가족 송년회가 해를 넘기지 않고 열린 것이다. 아버지는 너무 먼 길을 떠나는 바람에 미처 못 왔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