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갔다가 둥근 조선호박을 샀습니다. 나란히 놓여있는 길쭉한 애호박보다 두 배나 비싸더라고요. 하지만 통통하고도 나긋한 둥근호박의 태를 보니, 달큰하고 보드라운 맛이 떠오르며 침이 고여 안 살 수가 없었어요. 채수 가득한 둥그런 호박을 내키는 대로 숭덩숭덩 썰고, 볶고, 고춧가루와 깨를 잔뜩 쳐서 국물이 자작한 호박볶음을 만들었어요.
이 익숙한 손놀림은 제가 아주 오래전에 매일 봤던 것, 그래서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끼니때마다 주방에 서던, 밥상에 마주 앉던- 할머니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사는 일은 어떤 조각들을 쉴 새 없이 모으고,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고, 열심히 그리워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연말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지속적인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간 무언갈 읽거나 쓰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일 때문에 읽어내야 하는 책도 있었는데요.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느리게 읽거나 오디오북의 도움을 받아 읽었습니다(사실 읽은 게 아니라 들은 거죠). 계약했던 책의 마무리 작업과 약속된 프로젝트들만 투쟁하듯 해냈고, 원고 청탁도 대부분 거절했어요. 개인작업은 당연히 전혀 못했습니다. 퇴사원 주간보고가 1월 이후 멈춰져 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6월이 되어서야 느릿느릿 수렁을 기어올라왔습니다. 맑고 밝은 빛이 내리쬐고 곳곳에 녹음이 우거져 쉴 만한 자리가 있는 곳에서 돌아보니 이제야 보여요.
'거기 좀 깊은 곳이었구나, 내가 거기 있었구나...'
배달음식 중독, 습관적 셀프 위장고문, 요태기(요리+권태기)를 극복하고 장 보고 밥 차리는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딱 지금만 만날 수 있는 생생하고 값 좋은 채소들을 고르고 다듬고 끓이고 찌고 볶는 일들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땀을 뻘뻘 흘리며 공원을 달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사 마시는 루틴을 만들고 그런 루틴이 있는 스스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음과 달리 육체의 건강은 아직 그리 좋아지지 못했습니다. 몇 개월 내내 쌓은 업보들이 순식간에 털어질 리 없죠. 게다가 5월부터 시작된 면역 이상으로 온갖 염증과 아주 다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스스로를 열심히 돌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를 충만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이렇게 잘 지내다 보면 곧 괜찮아지리라는 믿음도 있고, 실제로 여러 증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거든요.
부끄럽지만 저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보호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저 자신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 뭔 줄 아세요? '조금만 더 참아봐', '나약한 놈'(드라마 대사 같지만 입에 착착 붙어서 자주 썼습니다), '이게 최선이야? 확실해?'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말, 타인에게는 절대 하지 않잖아요, 타인의 고민과 힘듦은 늘 귀 기울여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없을지 찾아보려고 애쓰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달라지려고요.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말은 저에게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보려 합니다. 스스로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금쪽같은 보호자'에서 '훌륭한 보호자'로 거듭나려고요. 스스로에게 다정하고 친절한 보호자가 되어가는 일이 올해의 남은 날동안 가장 잘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려면 무더운 여름에도 열심히 장을 보고 식재료를 다듬고 끓이고 찌고 볶는 일들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사소하지만 또 중한 일들을 부지런히 해내며 자주 퇴사원 주간보고를 부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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