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주차 주간보고 드립니다 (vol.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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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행지에서 퇴사원 주간보고를 보냅니다. 소소소 바람이 불면, 저마다의 빛깔로 반짝이는 나무들을 품은 숲을 바라보면서요.
짧은 영감여행을 계획하고 떠나왔습니다. 이달 말까지 반드시 마쳐야 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내내 미루다 어느새 마감이 임박해져 버렸거든요.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시점인데, 한참 미뤄온 일들은 시작 자체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는 마음을 볶는 대신 환경을 바꾸어 보기로 했어요. 그리하여 숲에 둘러 싸인 집, 맨끝집이라 이름 붙인 친구의 작업실에 왔습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이 집을 둘러 싼 나무를, 숲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이런 것들을 관찰했어요.
여린 잎은 조금씩 차근히 푸르러진다는 것. 한 가지에서 틔운 잎이라도 그 크기와 색이 다르다는 것. 바람이 불면 나무들은 그저 너울거리며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린다는 것. 꺾인 가지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일도 있다는 것.
짊어지고 온 일거리 중 끝마친 일은 아직 없습니다. 그렇지만 미루고 미루다 너무 어려워진 시작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여행은 '영감여행'이라 이름 붙였지만, 결국 주어진 일들을 해내는 건 갑작스런 영감이 아니라 제가 보냈고 또 보낼 하루들이겠지요.
지붕 너머 성실한 숲과 자연을 바라보며 퇴사원 주간보고를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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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퇴사 후,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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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회사라는 조직을 떠나 2주를 보냈고, 3번째 퇴사원 주간보고를 보냅니다. 누적으로는 7번째 주간보고네요. 그간의 주간보고엔 '퇴사 후 여백이 많아진 일상'과 '프리 에이전트로서 제가 기대하는 미래'처럼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 주로 쓴 것 같은데요. 오늘은 퇴사 후 일상의 또 다른 단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요. 퇴사 후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입니다.
1. 회사가 보증하던 경제적 신용이 사라졌습니다.
신용대출, 신용카드 발급이 까다로워졌습니다. 여기서의 신용은 부채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상환할 수 있는지인데요. 월급, 그러니까 안정적 소득이 없는 자에게 돈을 빌려주기란 쉽지 않겠죠. 제 경우, 기존에 사용하던 신용카드가 있었기 때문에, 마이너스 통장만 퇴사 직전 재개설*을 했습니다.
하지만 갱신을 해야하는 1년 후엔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마 한도는 줄고, 금리는 오르겠지요. 곧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고지서도 도착할 거예요. 회사와 나누어 부담하던 비용들이 오롯이 제 몫이 되겠지요. 물론 소득이 줄었으니 전체 비용도 줄기는 하겠지만요.
*대출한도와 기간을 최대로 쓰기 위해서 갱신이나 한도상향을 하지 않고 해지 후 재개설을 했습니다. 덕분에 금리는 이전보다 올랐습니다.
2. 사회적 신용도 희미해졌습니다.
경제적 신용까지는 예측했던 상황이라 새롭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며칠 전, 직무 관련 세미나를 신청할 때 '아...' 하는 탄식의 순간이 있었어요. 소속과 직책을 입력해야하는 칸이 있었던 것인데요. 공란으로 두고 넘어가려 했더니, "필수입력 항목을 확인해주세요" 라는 경고가 뜨더라고요.
고민하다 프리랜서라고 입력한 후 신청하기는 했는데, 순간 접수가 안될까봐 걱정이 되더라고요. 회사원일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 잠깐 사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순간이 수없이 많을 테지요. 긴 말 없이 나를 대변하곤 했던 소속의 부재를 느끼는 일이요.
3. 작은 지출 앞에서도 자주 망설이게 됩니다.
얼마 전 동네 산책을 나섰다 한기를 느꼈어요. 낮에는 초여름처럼 덥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잖아요. '이러다 감기 들면 큰일이지'하며 동네 까페로 향했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걸으려고요. 근데 결국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순간 찻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속이 쓰렸어요. 퇴사 후 독립하면 듬직하던 월급은 사라지고, 단숨에 월급만큼 벌지는 못할테니- 아껴 써야하고 빠듯할 것이다, 라고 예상은 했지만요. 일상의 사소한 순간까지 이런 생각이 스미니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4. 새로운 메일과 동료를 한없이 기다립니다.
회사원이던 때에는 메일을 기다린 적이 있었나 싶어요. 새로운 메일 = 새로운 업무니까요. 오히려 싫어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프리 에이전트가 된 지금은, 메일함을 자주 새로고침합니다. 혹시 새로운 일감이 도착하지 않았나 싶어서요. 물론 새로운 메일이 도착하는 날보다 'No New Messages'란 문구가 맞아주는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다 독자님들의 답장을 받으면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기쁩니다.)
늘 연결되어 있던 유능한 동료들이 이제는 디폴트가 아니라는 것도 저를 슬프게 하는 사실 중 하나입니다. 프리 에이전트는 프로젝트에 따라 동료들이 자주 바뀌기도 하고, 높은 빈도로 혼자 일하니까요.
5. 선택과 고민은 생계에 관한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일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것.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회사 안에서는 그 주도성, 책임감이 한정적이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회사 안에서는 성공에도, 실패에도- 늘 완충지대가 있었네요.
이 일을 할지 말지,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둘지, 어떤 조건을 다시 조정해야할지- 모든 것이 제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제 능력치, 커리어, 일의 재미, 페이, 기한 모두를 고려해서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저글링하듯 운영하는 것. 어렵기도 어렵고, 생계가 걸린 일이니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그간 퇴사 후 일상에 대해 너무 핑크빛으로 이야기한 것 같아, 또 다른 면도 꺼내어 이야기해 봅니다. 모든 일에는 여러 면이 있으니까요.
종종 퇴사 고민을 한다는 구독자님들의 편지를 받습니다. 모두의 상황이 다르고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니, 퇴사일기를 쓰며 사실과 감정을 구분해보시란 이야길 했었는데요. 어쩌면 이 글은 그 편지들에 대한 답장일지도 모르겠어요. 퇴사 후 일상에서 위에 열거한 슬픔을 상쇄할 만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겠지요. 그렇담 그게 맞는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선택했어요. 손에 움켜쥔 것을 놓아야 새로운 것을 집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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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담 : 삼색도화
사진첩과 일기장에 담아 두고픈 식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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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열해음소(열 번 이상 해 먹은 음식 레시피만 소개합니다)에 이어 또 새로운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코너 만들기에 재미 붙여버린 발행인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여러 소재로, 퇴사원 주간보고를 지치지 않고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이번 코너는 '사일담'이라 이름 붙였는데요. '사진첩과 일기장에 담아 두고픈 식물들'의 줄임말입니다. 순간을 반짝이게 해 주는 꽃과 나무, 풀들을 소개해보려고요.
지난 주말, 수풀집에 잠시 다녀왔어요. 머물고 있는 맨끝집이 수풀집과 그리 멀지 않거든요. 초여름이 성큼 온 것 같은 시골길을 천천히 운전중이었는데요. 아름다운 겹꽃이 활짝 핀 나무를 지나쳤어요. 신기한 건, 한 나무에 여러 색의 꽃이 피어있다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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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론 그럴 수가 있나 싶었지만, 분명히 봤거든요.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차를 돌려 다시 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빨간 꽃, 하얀 꽃, 분홍 꽃이 피는 나무가 한데 모여 있는 걸 잘못 본 걸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제대로 본 게 맞더라고요. 빨간 꽃, 하얀 꽃, 분홍 꽃이 풍성하게 핀 나무였어요.
돌아와 열심히 구글링을 했어요. 그리하여 알아낸 이 나무의 이름은 삼색도화입니다. 말 그대로 세 가지 색의 꽃이 피는 복숭아나무인데요. 외래종이나 개량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있었던 자연품종이자 희귀종이라고 합니다. 이미 조선시대에 삼색도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한시 '백사댁응호삼색도'가 있었다고 하니까요.
복숭아나무니 복숭아 열매를 맺어야하지만, 삼색도화는 꽃을 보는 꽃복숭아나무로 열매는 거의 열리지 않는다고 해요. 이 정도의 신비함과 우아함이라면 열매가 열리지 않는 아쉬움은 달래고도 남는다 싶어요.
5월까지는 길에서 삼색도화를 마주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치신다면, 삼색도화의 이름을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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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간보고의 제목은, 배우 김혜자가 '김혜자'라는 동명의 인물을 연기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가져왔습니다. 아침에 창 밖의 연둣빛을 바라보는데, 드라마 마지막에 주인공 '혜자'가 하는 나레이션이 떠올랐거든요.
여러 번 돌려 봤고, 배우님이 시상식에서 소감을 대신하여 낭독한 영상도 여러 번 봤었는데요. 오늘 찾아 읽으니 또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구독자님께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이 부신 한 주를 보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눈이 부시게의 엔딩 장면의 대사와 함께 주간보고를 부칩니다. 다음 주는 주간보고(4/30)는 개인사정으로 한 주 쉬어 갑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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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은 김미리에게 있으며, 출처 표기 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merrym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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